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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단상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개인의 포스팅에 대한 가치판단에 대하여.

 

             최근에 드는 생각인데 확실히 나는 페이스북이나 싸이월드와 같은 류의 sns와는 잘 안 맞는다. 주위 친분적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서비스는 집 뒤 정원 꾸미듯 sns를 다루는 나에게는 사실 뭔가 버겁다. 차라리 트위터가 본인에게 잘 맞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내가 쓰고 싶은 말 쓰고 벽에다 푯말 달 듯이 쓰는 트위터가 주위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주가 되는 페북이나 싸이보다는 더 맞는 듯하다.


             사실 본인이 sns를 어떻게 쓰던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싫다. 허세를 부리면 어떻고, 비련의 주인공이 되면 무슨 상관인가? 좀 찌질하고 징징되는 것에 무슨 상관인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거나 구독 및 친구를 끊으면 되는 것이지……. 당신이 그 사람을 책임 못 지듯이 그 사람의 sns 공간도 사실 책임지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미학적으로 진중권의 말을 빌려 쓰자면 구리다.’라고 말할 순 있다. 하지만 이는 등치적으로 그것을 구리다.’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를 미학적으로 또다시 구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클리세라는 차원에서 두 행동 모두 구리다.’라는 것은 별 다를 바 없다. 비겁한 양비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개낀도낀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생활상은 참 수없이 변해왔다. PC통신 bbs시절부터 봐온 나로서는 지금의 sns가 사실 이상할 때가 많다. 원래부터 사이버 스페이스란 공간은 ‘Wonderland’였지만, 예전의 Wonderland가 지금의 Wonderland와는 분명히 다르다. 간결하게 말해서 햏자와 훼인이 있던 DC가 지금의 DC와 같은지, 그리고 나우누리의 베스트 유머가 일베나 웃대하고 같은 지 되묻고 싶다. 이는 명백히 공간적 맥락이 다른 것이다. 프리챌의 클럽과 다음의 카페가 현재의 카페 및 클럽과 같은 양상인지 분명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이것이 단순히 기술의 발전 때문일까? 물론 기술의 발전은 중요한 변수다. 28k 모뎀 뽈뽈 돌리며 비키니 사진 한 장받으려고 기를 쓰던 그 시절과 토렌트를 돌리는 지금이 같다는 것은 기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유저의 확대가 이러한 변화를 낳았다고 본다. 분명 이전보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유저는 대중적으로 정말 확대되었고 이것이 지금의 변화로 이어졌다고 본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전보다 지금의 사이버 스페이스가 뭔가 대중적인 공통성을 가지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전의 PC통신 시절 얘기를 잠깐 하자면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의 분위기는 극명히 달랐다. 이는 분명 단절된 플랫폼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작동하지만, 오늘날의 커뮤니티처럼 게시물의 전파성 자체는 그 시절에도 참 활발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웃대-DC-일베 등등등등의 커뮤니티들이 비슷한 성질을 보여주고 비슷한 형태를 보여준다면 그 시절은 참 플랫폼과 커뮤니티 마다 극명한 차이를 보여줬었다.[각주:1]

 

             결국 이러한 변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금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생활을 바라볼 때의 미학적 관점을 과거나 미래에 적용하는 것이 사실 무리라는 것이다. 또한 개개인의 유저의 활동을 미학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것이 논평이 될 수 있겠지만 하나의 공리나,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많은 수의 네티즌들이 이를 공리나 정의로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넷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반에서 미학적인 것, 유행이나 패션 등등을 다룰 때 나타나는 측면인데 일단은 넷에서 한정 짓자면 이는 매우 극명히 나타난다. ‘촌스러움촌스럽다는 코멘트나 질적 가치 판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지탄과 비판이 된다. 오프라인보다는 넷에서의 이러한 흐름은 더 극명히 나타나는 데 이를 넷에서의 정치적 영역으로 적용해서 보자면 이른바 나꼼수를 지지하며 옹위하는 측이나, 나꼼수의 열풍이 식으며 이를 비판하는 측이나 모두 똑같이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미학적 판단이 어떤 논리와 합리적 판단을 넘는 선험적인 본능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공리적 차원에서의 지탄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행태들의 주된 행위자가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컨텐츠를 소비하는 쪽에 있다는 것이다. 즉 생산자가 결국 미학적인 트렌드를 이끌지만, 이를 공리적,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하는 것은 소비자라는 것이다. 여기에 주된 책임을 가지는 쪽은 즉 생산자가 아니라 그 생산자가 만들어 놓은 미학적 컨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라는 것이다. 즉 미학적 가치를 공리적, 사회적 영역으로 까지 무리하여 확장하는 것은 결국 소비자라는 것이다. 단 여기에서 소비자란 개념이 본래 개인적인 층위에서 이뤄져야 하는 이러한 미학적인 판단을 통해 매우 집단적, 사회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넷에서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필자는 이를 인터넷 사용자가 증가하면서, 이른바 인터넷의 대중성이 강화되었다고 본다. 즉 대중문화로서의 인터넷이 자리를 잡으면서 컨텐츠 생산자와는 별도로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대중성이 확대되었고 이는 대중문화라는 측면에서 미학적 기준이 어느 정도 획일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른바 힙스터문화, 대안 문화마저도 대중문화로서 하나의 영역이고 미학적 판단 기준이 되지 사실 그것이 소비자의 대중성에서 벗어난 그런 성질의 것은 현재로서는 전혀 아니다. 즉 대중문화로서의 하위적 차원에서의 존재이지 현재 인터넷 문화에서의 대안은 사실 다수가 이용하는 플랫폼과 커뮤니티에서 공간에서 향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도 누구는 찌질하고, 촌스럽다고 신나게 까이고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이다. 하지만 미학적 판단은 미학적인 선에서 멈춰야지 그것이 가치의 재단으로서 이어지고 동시에 그 개인을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결국 그것이 그 개인의 어떤 가치로 나타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에 대해서는 난 아니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이 페북, 트위터, 싸이, 이글루스 등등 어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논하던 마찬가지다.

 
  1. (1) 이와는 별도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 개인의 활동형태인데 오히려 개인의 활동형태는 지금이 보다 더 다양해졌다. 그 시절에는 개인의 활동 자체의 다양성 자체는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개개인이 내놓는 컨텐츠가 다양해졌고, 하나의 플랫폼과 커뮤니티를 누림에 있어서 개인의 활동 형태는 매우 다양해졌다. 즉 개인과 커뮤니티의 다양성과 획일성이 사실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다면 다뤄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내가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개인의 측면이 아니라 커뮤니티의 층위에서 논하는 것이다.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넷 안에서의 컨텐츠 생산자는 개인으로서 다양해졌고, 소비자는 집단과 사회로서 더욱 단일 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