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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전주이야기를 쓰는 것 같은데 이 글은 하나의 다른 이야기다. 최근 한옥마을의 상업화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사실 서울[1]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한데, 한 지역공간의 상업화가 진행되어 그 지역이 가지고 있던 아이덴티티가 상실되고 이어서 그 지역의 매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다. 이는 과거에는 신촌과 대학로가 그랬고, 홍대가 그랬으며, 가로수길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주 한옥마을에 있어서 대입함에 있어서 큰 맥락이 빠져있다고 보는 쪽이다. 과거의 한옥마을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상업화를 비판하면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한옥마을의 유래를 전주시 홈페이지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2]

을사늑약(1905)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문제는 일제시대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이후의 한옥촌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주에서 그럭저럭 살던 사람들은 교동과 풍남동에서 그 옆동네인  중앙동과 노송동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전주시의 중심가가 점차 이쪽으로 확대되며 이 분들은 다시 조금 더 외곽지역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불어 80년대 삼천동, 효자동, 평화동 일부, 인후동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전주시 인구들은 이러한 아파트촌에 집중하게 되었고 90년대 이후 중화산동, 서신동, 아중리가 개발되면서 전주 중심가는 제대로 크리스탈러의 이론에서의 쇠락한 중심지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옥마을은? 70년대까지는 거주단지로서 한옥마을이 그럭저럭 지속이 될 수 있었지만 이미 남부시장은 한옥마을 일부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전통에 대한 가치가 사회 전반에서 환기되기 시작하면서 전주시는 이 한옥마을을 일종의 재건축 제한지역으로 설정하게 된다. 문제는 그 덕분에 수리 자체도 힘들게 되었다. 한옥마을이 주거 지역으로 가치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만 해도 성심여고로 놀러 가면(왜 거기로 놀러 가는지는 묻지 않기로 한다. 오래된 일이다.) 그 앞은 정말 쥐죽은 듯이 조용한 죽은 동네였고 경기전에는 장기 두던 할아버지들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어버린지 2-30년이 되서 완전히 굳어버렸던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보태면 대학에 진학한 2000년대 중반에 이 한옥마을의 집 한채를 아주 싸게 사라는 권유가 집에 들어왔다. 필자의 부모님은 냉정하게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전주시는 한옥마을을 관광상품화 하면서 우리가 권유받은 집은 떡갈비집이 되었고, 그 집의 가치는….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부들거려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하겠다.


이른바 죽은 동네가 관광상품이 되면서 완전히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침체된 전주 경제를 살리는 신의 한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완전히 죽어있던, 먼지쌓인 박제 같던 한옥마을에 어떻게든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은 맞다. 전주 한옥마을이 먹자골목이 되어서 싫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재밌는 것은 전주가 관광지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음식이다. 더 재밌는 것은 그 대부분 음식으로 유명한 식당들이 한옥마을에 원래 위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딱 하나만 예외이다. 베테랑은 원래 그 자리였다. 하지만 그 전의 전주사람들이 베테랑을 인식할 때도 이것을 한옥마을에 있다고 인식한 것이 아니라, 성심여고 앞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즉 원래 한옥마을은 그냥 가치없고 오래된 주거지역이었지, 상업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가 그것을 만들었냐고 질문을 하면 그것은 관광객과 외부에서 투입된 자본이지, 전주 한옥마을 그 자체가 아니다. 관광객은 전주에 대한 정보가 결여가 되어 있고 이 상태에서 편의상 한옥마을에 있는 음식점을 찾게 된 것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이율배반일지도 모른다. 다만, 많은 관광지가 그런 방식으로 상업지역이 성장한다. 하지만 관광객이 찾는 그 유명한 음식점들과 관광객들이 모르지만 괜찮은 음식점들은 한옥마을에 위치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곳에 분점을 만든 것일 뿐이다. 바게트 샌드위치로 유명한 길거리야는 원래 전주대 앞에 있었다. 심지어 그 집은 원래 CD가게였고 MP3의 등장으로 망한 사장님이 들고 나온 아이템이 샌드위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이 본격적으로 전주외에서 입소문을 탄 것은 한옥마을에 들어 섰기 때문에 관광객이 부담 없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런 식의 맥락적 과정을 거쳐서 전주 한옥마을이 상업화가 된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보자. 전주 한옥마을의 상업화라는 지적은 전주 한옥마을의 정취라는 관념적 가치의 상실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 관념적 가치는 어디까지나 관광객으로서의 가치일 뿐이다. 주거민과, 전주 시민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고 혹은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박제되어서 처연하게 죽어가는 한옥마을과 지금의 한옥마을의 상대적인 가치 부여를 하자면 어디에 더 부여를 해야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전주가 관광지로서 자리를 잡은 것은 불과 10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주는 원래도 이른바 고도(古都)로 불릴 수 있는 도시이며, 전라북도 도청소재지로서 가장 큰 도시다. 관광객의 불만족으로 인해 관광객이 줄거나 혹은 관광수입이 줄지도 모르겠지만 이른바 과거의 정취나 낭만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주홍글씨를 받기에는 전주 한옥마을은 원래 참 안타까운 곳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뭐 우리가 정취와 낭만을 느끼기 위해서는 너희는 그대로 살아라라는 것은 좀 가혹하지 않은가?



[1] 사실 다른 대도시는 이런 경우가 많지 않다.

[2] http://tour.jeonju.go.kr/index.sko?menuCd=AA060010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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