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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낭은 기존의 Naiton을 규정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에 대하여 그것이 근본적인 요소가 아님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르낭의 비판의 대상은 주로 피히테가 규정한 Naiton의 요소가 많다. 대표적으로 종족, 언어, 영토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르낭은 피히테나 혹은 그를 비롯한 여러 Naiton에 대한 기존의 담론 들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우선 르낭은 왕조, 혹은 왕조 국가와 Nation은 별개라는 말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프랑스 대혁명이 기반하고 있으며, 아직 왕조가 잔존하고 있으며 또한 Nation의 출발이 왕조 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Nation의 존속과는 별개의 관념임을 지적한다.

하나의 Nation은 왕조라는 원칙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왕조에 의해 형성되었던 Nation들도 왕조 때문에 존재를 멈추는 일 없이 그 왕조와 분리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p.66

르낭은 우선 종족으로 Naiton의 기원과 Naiton의 정수를 찾는 시각에 대해 비판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 이러한 시각은 이른바 영속주의라는 시각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주로 역사학을 하는 진영에서 Naitonalism이 단순히 근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고대로부터 지속되어왔다는 논의에서도 종족은 Naiton의 배경과 기원으로서 설명되어지고는 한다. 하지만 르낭은 이에 대해 분명히 반기를 든다. 종족과 Naiton이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족으로 Naiton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종족으로 Naiton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이는 훗날의 나치즘의 게르만주의를 생각할 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Nation의 원칙을 종족 원칙으로 바꾼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오류이며, 이러한 오류가 지배적이게 된다면 유럽의 문명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Nation의 원칙이 옳고 정당한 만큼, 종족들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원칙은 편협하며 진정한 진보를 위해서도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p.67

즉 Naiton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종족으로 환원되는 것은 Naiton의 정당성을 종족의 순수성으로 이어지게 하고 이는 그 순수성에서 배제되는 타자들이 존재하기도 하는 부작용이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에 르낭은 명백히 반대를 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도 순수한 종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한다. 르낭의 이러한 지적이 2차대전은 커녕 1차대전 이전에 나온 발언들이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발언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매우 잘 보여준다.

결국 진실은, 순수한 종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종족적인 분석에 정치의 근거를 두는 것은 공상에 기초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p.69
유럽의 지도를 형성시키는 본능적 의식은 종족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며, 유럽의 중요한 민족들은 본질적으로 혼혈 민족입니다. p.71

Naiton의 형성을 언어로 찾는 시각에도 르낭은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사실 언어를 Naiton의 정수로서 꼽는 시각을 가장 견지하는 가장 큰 시각 중 하나는 피히테가 Naiton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피히테는 공간적인 영토와, 인문적인 종족,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언어라는 형태로서 Naiton을 발현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르낭은 언어라는 것보다 Naiton을 형성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한 것을 언급한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Naiton을 바라보는 것이 르낭의 Naiton을 바라보는 시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언어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지입니다. 다양한 방언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통일되고자 하는 스위스의 의지는 종종 굴욕적인 사건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유사성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p.73

스위스의 사례를 통해 르낭은 언어보다 의지가 더 중요함을 말한다. 즉 르낭은 Naiton을 구성하는 데 있어 Naiton안에 있는 개인과 개인의 의지가 곧 가장 중요하며 이러한 의지를 통해 Naiton이 이뤄진다고 말을 한다. 르낭은 언어가 Naiton의 정수가 아닌 이유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을 한다. 여기에서 르낭은 언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결과물이지, Naiton을 만드는 개체가 아니며 또한 언어라는 것으로 Naiton을 규정한다면 언어의 한계 안에서 Naiton이 갇혀져 버릴 수 있음을 들며 비판한다.

언어는 역사적인 부산물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혈통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언어라는 것이 우리가 영원토록 함께 할 집단을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영원토록 인간의 자유를 속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편협한 생각은 종족에 대한 지나친 주목과 마찬가지로 위험성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에 대한 생각에 과장된 표현을 불어넣을 때., 그것은 우리를 Nation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한정된 문화 안에 갇혀버리게 합니다. pp. 74-75

또한 르낭은 종교가 Naiton과 관계가 없음을 말한다. 이는 지금에 와서는 당연해졌지만, 종교와 국가간의 관계가 멀지 않았던 당시에는 언급할 필요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기타의 설명을 더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본인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에 동의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까봐 르낭의 인용문을 일단 남겨두기로 한다.

우리 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통일된 방식의 신자 대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믿고, 종교 의식을 행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국가 차원의 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기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신자이지만 그 어떠한 종교의식도 행하지 않으면서 각기 프랑스인, 영국인, 독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종교는 개인적인 것, 각자의 양심에 관계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p.77

르낭은 또한 이익 공동체가 Naiton과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을 연장해본다면 오늘날의 통합이론으로서의 기능주의나 신제도주의를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시절에 르낭은 지금과 같은 지역 공동체를 상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되며 이익 공동체을 Naiton과 연계시키는 시각에 대한 비판 역시 그리 길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르낭의 비판을 오늘 날의 통합이론과 연계하는 것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익 공동체는 상업상의 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성에는 감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인 동시에 육체입니다. 예컨대, 관세동맹은 조국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p.78

마지막으로 르낭은 영토를 Naiton의 생성과 연결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비판의 배경에는 앞에 글에서도 언급한 알자스-로렌의 문제가 있었으며 또한 피히테 역시 Naiton과 영토라는 공간적 개념과의 연계를 중요시 하였기 때문에 르낭의 규정하는 자기 의지로 인해 이뤄지는 Naiton과는 충돌하는 시각으로서 비판을 가해야 했다. 여기서 르낭은 영토라는 것은 하나의 토대일 뿐 그것이 Naiton을 만들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토로서만 Naiton이 이뤄지는 것은 분명히 아님을 지적한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 날의 쿠르드족이나 아르메니아, 혹은 유태인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사료된다. 영토라는 것이 Naiton과 연계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Naiton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종족이 하나의 Nation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듯이 영토 역시 Nation을 만들지 못합니다. 땅은 투쟁과 노동의 장인 토대를 제공합니다. 사람은 영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p.79
Nation은 토지라는 외형에 의해 결정된 집단이 아니라 역사의 깊은 분규의 결과로 생긴 정신적 원칙이며 영적인 가족으로서의 집단입니다. p.79

르낭은 이렇게 기존의 Naiton과 Naiton의 기원, 생성과 관련된 여러 시각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다음 이어지는 글에서 르낭은 앞에서 설명한 자기 의지가 왜 Naiton으로 이뤄지는 데 있어 중요하게 작동하는 지에 대한 설명으로 나타난다. 르낭은 기존의 담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많은 함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함의에서 보여지는 가능성들이 현대사에 있어서 얼마나 나타났는지 생각해본다면 르낭의 Naiton에 대한 고찰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정말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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